고목나무에 꽃이 핀다
박 근 옥
따사로운 오후, 가을볕이 옥상 텃밭으로 날 유혹한다.
옥상 꽃들 옆에 자리를 잡는다.
중학생이 된 당당함을 뽐내며 낡은 상을 펴고 찢어진 파라솔에
눈부신 해님 얼굴 가리고, 너덜너덜한 의자에 비닐봉지 깔고 턱 앉아보니,
이런 명당이 어디 있으리오.
자연으로 병풍을 치고 강물이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는 언덕 위에
집 한 채! 글 쓰는 선비의 명당이라고나 할까?
내 마음에 한이 풀리니 옥상 작은 텃밭이 내 마음의 명당이로다.
터질 것 같은 부푼 꿈과 마음을 백지와 연필 친구에게 맡기어 본다오.
옥상 텃밭은 감나무, 대추나무, 엄나무, 오가피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다네. 살며시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공주꽃, 과꽃,
코스모스, 박하, 하늘하늘 춤을 추면 벌과 나비 반기어 날아갈 줄 모른다.
나도 따라 볼을 대고
“꽃들아 사랑해. 너무 아름다워!”
속삭이면 질투나 하듯이 벌 한 마리 날아와 ‘앵’ 하고
내 머리카락을 탁 치고 날아간다.
누런 벼이삭이 나날이 겸손해져 고개 숙이고,
소녀 얼굴 같은 감은 주렁주렁 발갛게 길손 걸음 붙잡고서 입맛 다시게 한다.
무심했던 푸른 호박잎은 검버섯만 덕지덕지,
바스락바스락 가는 세월 아쉬워 옥상바닥 뒹굴고 누런 호박 세 덩이만
을씨년스레 덩그러니 매달려 있네.
연약한 상추는 외로운 양 가을바람에 떨고 있다.
무는 일광욕을 하려나? 흙 밖으로 쑥 내밀어 파란 대가리 일렬로 뽐내고 서 있다.
손에 닿을 듯 한 용마산 능선 위로 목화송이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숲 사이에 붉은 단풍 한 가지 날 오라 손짓하네.
내 마음 목화송이에 포근히 올라타고 온 세상 소풍간다, 행복에 취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몇 안 남은 친구들에게 물이나 주자.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고 나와 가을을 속삭이고 있다.
행복한 마음을…….
먼저 가버린 채소친구들이 안쓰럽다.
내 욕심 때문에 사방이 콘크리트 빌딩,
단단한 시멘트바닥 흙 조금 깔아놓고 어린 시절
고향집 꽃들에게 내 설음 털어놓던 그대로 옮겨놓고,
소 몰아 밭갈이 하던 대신 굼벵이, 쥐며느리가 밭 갈아주면,
그 더운 옥상에서도 잘 자라주며 수십 가지 식물이 어울려 음악회도 열린다.
감나무, 대추나무 그늘에선 참새들 짹짹, 왕매미, 물매미, 찌름매미
노래 부르고 벌 나비춤을 춘다. 고추포기 그늘에선 이름 모를 풀과 벌레들이
속삭이고, 전봇대 높은 곳에 까치, 비둘기 기웃기웃 장단 맞추면
담 밑에 귀뚜라미 고향소식 전하던 먼먼 고향집을 달려간다.
그렇게 텃밭친구들을 저녁때 마다 목욕을 시키고,
늘 같이 하던 친구들이 찬 서리에 하나 둘 가버리면 내 눈에 이슬이 맺힌다.
외로움에 떨고 있는 한 잎의 잎 되는 게 싫었다.
올 가을은 보잘 것 없는 옥상텃밭에서 책상을 펴고 행복에 취하노라니,
온 세상이 아름답고 쓸 말이 너무 많아 가슴이 터질 것 같다.
13살 소녀라도 이 기쁨은 모를 것이다.
나도 중학교 갔다고 세상 사람들이 들리게 소리치고 싶다.
하늘에 계신 우리 엄마 미안하지 않으시게
“엄마, 엄마! 나 중학교 갔어요. 13살 소녀가 되었어요.”
오십사 년 맺혀있던 그것을 가을 낙엽 따라 멀리멀리 띄워 보내렵니다.
꿈만 같아 머리를 들어 좌우를 돌아보기도 합니다.
찢어진 파라솔 틈으로 따뜻한 가을 햇볕이 내 귀에 속삭입니다.
‘마지막 행복 꼭 잡으라고! 주저앉지 말고 끝까지 가라고.
지난 세월 돌아보지 말라고,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그때는 선생님의 손을 놓았지만 이젠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끝까지 갈 것이다.
고마우신 선생님들 제 손을 끝까지 잡아주세요.
제가 놓을 일이 생긴다 해도 선생님들은 놓아주지 마세요.
마지막 행복을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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